최초의 컬러영화는 1915년 제작된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입니다.
이 영화는 독일 표현주의 영화의 대표작으로 평가받는데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흑백 영상과 대비되는 강렬한 색채감 등 독특한 미장센으로 주목받았습니다. 이후 무성영화 시대였던 1920년대 후반부터는 본격적으로 컬러 영화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1930년대 초 미국 대공황 시기에 접어들며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이 붕괴되었고, 이로 인해 많은 감독들이 실직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독립영화사들이 대거 등장했고, 이를 계기로 다양한 장르의 영화들이 탄생하였습니다. 또한 1940년대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전쟁물 위주의 작품들이 많이 만들어졌습니다.
컬러영화란 무엇인가요?
컬러영화는 말 그대로 색이 들어간 영화를 의미합니다. 초기 필름 시절에는 천연색 촬영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일부 장면에서만 제한적으로 채색되었습니다. 그러나 기술 발전으로 천연색 촬영이 가능해지면서 점차 모든 장면들을 천연색으로 촬영하는 방식으로 변화했는데요. 이러한 과정 속에서 기존의 흑백필름과는 다른 새로운 형식의 이미지 문법이 생겨났습니다. 특히 1950년대 중반 텔레비전 보급률이 높아지면서 극장 관객수가 감소하자, TV와의 차별화를 위해 더욱 화려한 색감을 추구하기도 했습니다.
흑백영화와 컬러영화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초기 컬러영화는 주로 유럽에서 제작되었는데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화면 톤 역시 어두운 편이었습니다. 반면 아시아에서는 일본 애니메이션처럼 밝은 색상을 선호했죠. 이렇게 지역별로 차이가 있었던 만큼 각 나라마다 고유의 특징을 가진 다채로운 스타일의 컬러영화가 나타났습니다. 예를 들어 한국전쟁 직후인 1954년 개봉한 신상옥 감독의 <지옥화>는 ‘한국형 컬러영화’라고 불릴 정도로 우리나라만의 정서를 담은 독창적인 색깔을 보여주었습니다. 한편 1960년대 프랑스 누벨바그 운동(1950년대 후반~1960년대 초반) 영향으로 사회비판적인 내용을 담은 예술영화들이 다수 제작되면서 이전까지의 전형적인 서사 구조와는 다른 실험적인 형태의 영화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국내 첫 컬러영화는 무엇인가요?
1957년 이규환 감독의 <춘향전>이 국내 최초의 컬러영화이자 상업영화였습니다. 이어 1958년 이강천 감독의 <피아골>, 1959년 홍성기 감독의 <시집가는 날>, 1961년 이성구 감독의 <장군의 수염> 등이 연이어 발표되며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1970년대 들어서는 임권택 감독의 <만다라>, <씨받이>, <아제아제바라아제> 등 불교나 무속신앙을 소재로 한 영화들이 자주 제작되었으며, 1980년대에는 장선우 감독의 <경마장 가는 길>, <꽃잎>, <거짓말> 등 이른바 ‘사회파 영화’라는 새로운 흐름이 형성되기도 했습니다. 1990년대 들어서도 박찬욱 감독의 <공동경비구역 JSA>, <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 <괴물> 등 여러 편의 흥행작들이 나왔습니다. 2000년대 이후로는 디지털카메라 및 컴퓨터그래픽 기술 발달로 한층 세련되고 감각적인 연출이 돋보이는 작품들이 꾸준히 나오고 있습니다.
컬러영화 이전엔 어떤 영화들이 있었나요?
1910년대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영화는 소리 없이 상영되었습니다. 이후 1920년대부터는 유성영화가 등장했는데요, 말 그대로 대사가 나오는 영화였습니다. 이때까지도 스크린 속 배우들은 모두 검은 옷을 입고 연기했고, 배경 또한 검은색 일색이었죠. 그러다 1930년대 미국 대공황 시기에 이르러 비로소 화려한 색채의 영화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나 할리우드에서는 스튜디오 시스템 도입으로 막대한 자금을 투자하며 많은 영화를 찍어냈는데요, 대표작으로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오즈의 마법사> 등이 있습니다.
무성영화 시대 때 사람들은 왜 그렇게 지루해했나요?
사실 처음 극장용 영화가 만들어질 때만 해도 영상보다는 음향효과가 더욱 중요시되었습니다. 그래서 화면전환 효과 같은 시각효과는 거의 무시되었죠. 게다가 목소리 녹음 역시 지금처럼 깔끔하게 되지 않아 잡음이 많이 섞여있었고, 심지어 음악소리조차 제대로 들리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관람객들은 지루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죠. 그러나 점차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사운드 품질이 좋아졌고, 동시에 여러 가지 특수효과 및 편집기술이 개발되면서 현재의 영화 수준에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유성영화시대 초기에는 어떻게 더빙작업을 했나요?
초기 유성영화 시절에는 자막처리 없이 오로지 성우의 목소리로만 모든 대사를 처리해야 했습니다. 따라서 한 명의 성우가 수십 명 혹은 수백 명의 캐릭터를 연기해야 했죠. 예를 들어 주인공 남자역을 맡은 배우는 여자친구 역을 맡은 다른 배우의 대사까지 전부 소화해야 했어요.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음성 합성 프로그램이 발달했지만 여전히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러다가 1940년대 후반 드디어 ‘목소리연기’라고 불리는 새로운 기법이 등장하게 됩니다. 이것은 원래 연극배우였던 찰리 채플린의 아이디어였는데요, 자신이 직접 출연해서 1인 2역을 하는 방법이었어요. 덕분에 훨씬 수월하게 작업할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 대중들에게도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